과학기자 아니라 다행이다 (2,000+1,100자)

이달 첫날 내 이름 달고 나간 모 과학기사가 모 포털에 송고됐다. 그 댓글란에 너무 어렵다는 독자 반응이 빗발쳤다. 어차피 내 능력의 한계 문제지만, A/S차원에서 이 글을 남긴다.

이 글에서 A/S할 대상은 일단 [‘여성은 배아 호르몬결핍 결과’ 이론 뒤집혀] 기사(http://m.zdnet.co.kr/news_view.asp?artice_id=20171001145957)고, 아래는 그 독자를 대상으로 쓴 보충설명임을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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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다음 모바일뉴스란에 송고된 문제의 기사. 댓글이 158개 달렸는데 뭔소린지 모르겠다는 내용이 부지기수다.

0. 한 줄 요약

  • 인간을 포함한 포유류 배아가 여남/암수로 성 분화(성 결정)하는 과정에 COUP 전사 인자(COUP-TFII)라는 단백질이 관여하는 걸로 파악됨에 따라, 교과서 성 분화 항목을 다시 써야 할 듯.

1. 사안의 중요성

  • COUP-TFII 단백질은 이전부터 존재가 알려져 있었고, 이 자체를 새로 발견한 게 아님. 새로운 것은 이 단백질의 역할에 쥐 배아의 성 결정 과정 관여가 포함된다는 사실. 뉴스는 COUP-TFII이 인간을 포함한 다른 포유류에 동일하게 작용할 것이라는 다른 전문가 견해도 함게 전했음. 빅뉴스임.
  • 빅뉴스인 이유. 학계는 수십년간 인간의 성 결정 과정과 그에 작용하는 인자를 다 알고 있다고 여겼음. 그게 정설로 굳어져서 교과서에 실려 있음.

2. 기존 학계 정설

  • 인간 여남/포유류 암수 성결정에는 X염색체의 SRY 유전자에서 고환결정인자(TDF), 뮬러관억제인자(MIF) 또는 항뮬러관호르몬(AMH), 테스토스테론, 3가지가 작용. 이 3가지의 작용을 ‘받은’ 배아는 남성으로, ‘안 받은’ 배아는 여성으로 분화함.
  • 배아가 암컷/여성으로 분화시 뮬러관(Müllerian duct)이란 조직이 난관, 자궁, 질로 발달함.
  • 배아가 수컷/남성으로 분화시 울프관(Wolffian duct, 독일어 표기를 따르면 볼프관)이란 조직이 부고환, 정관, 정낭으로 발달함.
  • 고환에서 만들어진 테스토스테론, AMH, 이 호르몬이 (암컷/여성 조직인) 뮬러관을 퇴화시키는 것으로 추정됐음.

3. 정설에 따른 편견

  • 이런 이유에서 학계는 여성을 ‘분화하기 전 배아의 기본 성’으로, 남성을 ‘성결정 인자의 영향으로 바뀐 성’으로 봤음.
  • 뒤집어 말하면, 남성이 될 기능을 갖고 있는 배아가 ‘성결정 인자의 결핍으로’ 여성이 됐다는 식의 표현이 가능함. 즉 이미 발현된 암컷/여성은 수컷/남성에 비해 배아기에 생물학적 결핍이 있었다는 성차별적으로 이해될 소지가 있는 서술의 근거가 됨.
  • 사이언스뉴스 원문은 수십년 학계의 인식을 묘사하는 문장에서 생물학적 ‘기본 성’을 basic sex가 아니라 default sex라고 씀으로써, 이런 뉘앙스를 전달한 듯함. (사실 default는 IT쪽에서나 ‘기본’이라 번역되지 일상언어 쪽에서는 ‘부족’, ‘결핍’, ‘불이행’ 따위의 의미로 쓰임.)

4. 실제 발견된 사실

  • 수컷/남성에게 뮬러관을 퇴화시키듯, 암컷/여성에게 울프관을 퇴화시키는 성 결정 요인이 있었음. 이 역할을 하는 게 COUP-TFII 단백질이었음.
  • 연구진의 실험결과, COUP-TFII 생산 유전자가 제거된 암컷 쥐 배아에서는 COUP-TFII 단백질이 제 기능을 못해서, 암컷 쥐에게 울프관이 퇴화하지 않은 채 남아 있게 됨. COUP-TFII는 암컷의 울프관 퇴화를 위한 생화학적 인자로 판단됨.

5. 종합해 설명하면

  • 포유류/인간 배아에게 3가지 인자(TDF, AMH, 테스토스테론)의 존재와 작용이 수컷/남성으로 분화하는 조건을 이루듯, COUP-TFII 단백질의 존재와 작용이 암컷/여성으로 분화하는 조건을 이룸.
  • 다시 말하면, 수십년간 굳어진 학계 정설과 달리, 포유류/인간 배아에게는 위에 언급한 3가지 성 결정 인자의 ‘부재’만으로는 암컷/여성으로 분화하기에 충분한 조건이 안 됨.
  • 또 다시 말하면, 더이상 암컷/여성은 수컷/남성에 비해 배아기에 생물학적 결핍으로 인한 결과라 서술할 수 없음. 암컷/여성과 수컷/남성 모두 배아기에 각자 필요한 인자를 갖춘 결과로 분화하는 성임.
  • 기사 원문(https://www.sciencenews.org/article/embryos-kill-male-tissue-become-female) 말미에 첨부된 외부 전문가의 의견에 따라 이 발견을 인류에게 적용하면 여성이나 남성 중 생식계통에 문제가 있는 환자를 치료하기 위해 COUP-TFII 단백질 관련 결함을 들여다봐야 한다고.

추가함.

1년에 한 번 쓸까 말까한 과학 기사. 8월달에 기사를 처음 봤을 땐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기 전이었지만 과학계 중요한 발견이라 생각하고 링크를 일단 쟁여 뒀다. 마침 이달초 초장기 명절연휴를 앞두고, 1개월도 더 잊고 지낸 외신 링크를 재발견. 어차피 덜 팔릴 것 같은 테크 기사보단 이걸 쓰자는 판단에서 번역해설에 도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원문 단순번역 피하고 나름대로 해설과 맥락을 제시하려고 애 썼지만 평상시 테크 외신 번역하는 것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그럼에도 한참 모자란 생물학 지식과 어학 능력 탓에 쉽게 쓰는 덴 한계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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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다음 모바일뉴스란에 송고된 문제의 기사 댓글란. 솔직히 저 빨간 글씨처럼 일일이 답을 해 주고 싶었다.

기대했던 네이버뉴스 쪽에서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의외로 미디어다음에 게재된 기사 페이지에선 반응이 뜨거웠다. 지디넷코리아 트래픽 기여도는 별로여서 아쉬웠지만, 미디어다음엔 댓글이 158개 달렸고 다음카페 여기저기로 퍼날라지기도 했다. 다만 댓글 대부분은 ‘뭔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반응이 많았다. 친절한 기사를 쓰는 데 실패한 결과라 생각하고 반성했다. 다른 기사처럼 오랫동안 읽히면서 의미가 좀 더 분명해졌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웬만하면 잘 안 하는 자체 A/S에 들어간 이유는 이렇다.

고백하자면, 원문에 배아가 암컷/여성 또는 수컷/남성으로 갈라진다는 것을 progress라고 표현했길래 ‘발달한다’는 표현과 ‘분화한다’는 표현 중 ‘발달한다’는 표현을 큰 고민 없이 선택한 측면이 있다.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서였는데, 이게 거슬린 독자도 있었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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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다음 모바일뉴스란에 송고된 문제의 기사에 생성되는 자동요약문. 내용 이해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기사에서 다룬 연구의 발견 성과는 배아→수컷/남성 발달과 배아→암컷/여성 발달의 가능성이 대등하다는 함의를 갖지만, 기존 학계 정설로 보면 (잠재적 암컷/여성인)배아→(수컷/남성 인자 결핍으로 덜 발달된)암컷/여성으로의 발달이 (수컷/남성 인자가 충족된) 수컷/남성 발달보다 ‘열등한 것’처럼 비칠 수 있다.

이런 점을 따져 보면, 어떤 독자에겐 거슬릴 수도 있지 싶다. 한국어에서 쓰이는 ‘발달’이라는 표현의 특성을 두루 감안하지 못한 내 불찰이다. 그래서 이 A/S 설명에는 개체의 성 분화를 ‘분화’로만 표현했고, 분화한 성에 따라 생식 조직이 변화하는 것만 ‘발달’이라고 표현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