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차산업혁명, 유럽의 시선 (4,800자)

유럽 전략컨설팅 회사 롤랜드버거에서 낸 책 [4차 산업혁명 이미 와 있는 미래]를 읽었다. 책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현상’이 구체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사례를 소개한다. 나머지 세계에는 어떻게 확산할 수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전망한다. 다양한 통계를 근거로 현시점부터 대략 2030년까지 세계의 산업, 사회, 경제, 국가적 변화가 어떻게 전개될지를 서술한다. 개별 변화에 기업이 대응해야 하는 방향을 제시한다.

유럽의 사례와 현황을 주로 다뤘다. IT의 중요성을 배제하지는 않지만, 기술 자체에 집중하지도 않는다. 간간이 언급된 머신러닝과 인공지능 관련 언급은 양념 성격이 짙다. 책의 전체 논의에서 IT와 관련된 키워드나 메시지는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다. 책 소개의 4차 산업혁명이 유럽에서 미국과 아시아에 빼앗긴 제조업의 주도권을 회복하기 위해 처음 촉발된 이슈라는 관점을 수용하면 수긍할 만하다.

개인적으로는 책이 유럽의 여러 제조기업 사례와 현황을 주로 다룬다는 점에서, 내 인식의 편향을 다소 희석해 줄 것이라 기대됐다. 내가 정보를 주로 얻는 출처와 경로의 영향이 크지만, 미국 IT업체 편향된 4차 산업혁명 관련 정보만 접하고 있는게 아닌가 걱정하던 참이었기 때문. 유럽의 4차산업혁명이 어떤 최첨단 IT와 융합해 실현되고 있는지, 뭐 이런 내용을 기대하고 읽으면 실망스러울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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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차 산업혁명 이미 와 있는 미래> 롤랜드버거 지음, 다산북스 펴냄. [사진=다산북스]
책 분량은 384쪽이다. 통독보다는 목차에서 관심 있는 항목만 골라서 읽는 발췌독이 나을 듯하다. 전체적인 내용이 긴밀하게 유기적으로 구성되진 않았기 때문이다. 기업 임원 인터뷰를 제외하면 전체적으로 자료를 설명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식의 서술이 많기 때문에 ‘읽는 맛’을 느낄 여지는 없다. 총평하자면 별 5개 만점에 3개 정도.

본문에서 그나마 IT와 연관지을 만하면서 인상적인 대목 몇 부분을 인용해 봤다.

p25
데이터는 종종 21세기의 원자재로 비유된다. 실제 비즈니스에 이용 가능한 데이터의 양은 1년 2개월마다 2배씩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미래의 공장은 저장, 처리 및 분석할 필요가 있는 엄청난 양의 데이터를 생산할 것이다. 그 말은 작업자들이 해야 하는 일 역시 크게 변한다는 뜻이다. 이미 프랑스에서는 63%의 공장 매니저들이 사이버 보안을 중요한 경쟁력으로 여기고 있다. 빅데이터를 처리하고 클라우드 컴퓨팅의 잠재력을 이용하기 위한 혁신적인 방법은 정보 활용의 새로운 방법을 제공해줄 것이다.
-<1부 4차 산업혁명의 약속> 중

인용 단락처럼 책은 데이터의 중요성을 여러 맥락에서 몇 차례 언급한다. 다만 그냥 데이터와 빅데이터라는 용어에 별다른 차별성을 두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가 밑줄 친 저 문장, 사이버 보안을 언급한 부분은 좀 문제다. 일단 문장의 의미가 불분명하고, 전체 단락의 앞뒤 맥락과도 동떨어져 있다. 이 책 내용 전체에서 사이버 보안을 언급한 비중을 고려한다면 그 한 대목인 저 문장이 잘못된 편집이나 구성의 결과물일 가능성을 보인다는 점은 아쉬운 일이다.

p164
개인정보 이용은 일본에서 논쟁 중이며 많은 사건 사고에서 보듯 보안은 불충분할 때가 많다. 빅데이터의 유용성을 보장하기 위해 일본 정부는 리사스(RESAS)와 같은 플랫폼을 구축했다. 리사스는 휴대폰 사업자, 운수 회사와 공공기관의 데이터베이스를 결합하여 모든 사람에게 개방한다. “예를 들어 어느 가정주부는 그 데이터를 이용해 특정일, 특정 시간에 도쿄 디즈니랜드가 얼마나 붐비는지를 예측해 블로그에 올린다”고 리사스 개발 책임자인 소다 고우는 말한다. 리사스 덕택에 어떤 지방자치단체든지 처음으로 지역 회사의 경제 교역량을 분석할 수 있게 됐다.
-<2부 4차 산업혁명의 현장> 중

여러 민간 서비스 제공업체의 데이터를 결합해 분석하도록 만들어졌다는 일본의 리사스 플랫폼이란 존재가 흥미롭다. 한국에선 공공기관의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이다. 그간 행정 데이터 제공 의무가 있는 경우에조차 이용 편의성을 보장하기보단 마지못해 형식적인 정보 공개 업무를 이행하고 있다는 인상을 받아 온 내게는 부럽기도 하다. 물론 이어진 다음 내용에서 약간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p167
최근 연구들은 공공 분야의 책임자들이 기업보다는 빅데이터에 덜 친화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이 공공 서비스의 품질을 개선하는 데 빅데이터의 영향이 비즈니스 분야에 비해 작다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2부 4차 산업혁명의 현장> 중

이 대목은 데이터 기반으로 서비스를 개선할 여지는 민간과 공공 부문 모두 많지만, 상대적으로 공공 분야는 데이터 활용 여건을 조성하거나 기반을 마련하려는 노력에 인색하다는 뉘앙스를 준다. 물론 한국과 유럽 공공조직의 빅데이터 친화성이 떨어지는 원인이 동일하진 않을 수도 있겠다.

1부와 2부에선 그나마 IT 또는 데이터와 관련된 얘기가 나오지만 책의 나머지 절반인 <3부 이미 미래에 도착한 사람들>과 <4부 2030 7대 메가트렌드>는 정말로 글로벌 트렌드를 포괄적으로 조망한다. 산업 중엔 독일을 비롯한 유럽 제조업 쪽 얘기의 비중이 상당히 높다. 생산의 핵심수단으로 로봇을 도입한 공장 관련 흐름과 그에 따른 산업, 경제, 사회, 시장 전망을 다루는 내용이 주를 이룬다.

3부 전체 내용은 이렇게 기업 고위 임원 인터뷰 질의응답으로 구성돼 있다. 인터뷰이와 제목만 열거해 보면 BMW 그룹 회장 하랄드 크루거 <로봇은 사람을 대체하지 못한다>, 우버 독일 CEO 크리스티앙 프리스 <자동차를 소유하는 시대가 종말한다>, SAP 제품 및 혁신 담당 이사회 임원 베른트 루커트 <디지털 경제의 ‘인텔 인사이드’>, 에어버스 최고기술책임자 장 보티 <기업들의 정보 보안이 취약해진다>, 포드 유럽 CEO 짐 팔리 <상업용 차량의 혁신>, 포레시아 CEO 패트릭 콜러 <디지털화가 조직의 제약을 줄인다> 여기까지다.

장 보티의 <기업들의 정보 보안이 취약해진다> 인터뷰는 실제로 사이버보안에 관한 기업 관점의 논의와 대응 방향에 대한 조언 성격을 담은 내용이 포함돼 있다. 하지만 결국은 대체로 ‘유럽의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제조 업종 또는 그 공급망과 서비스 제공환경을 아우르는 산업 생태계 안에서 기업들이 IT트렌드 변화에 따른 산업 지형의 격변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적응해 살아나가느냐는 쪽으로 흘러간다. 이게 3부 전체를 관통하는 메시지다.

이런 흐름에 예외적인 대목이 있어 인용해 봤다.

p220-221
“모든 애플리케이션에서 머신 러닝과 인공지능이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애플리케이션을 의사결정 지원 시스템으로 변환해야 한다. 이것이 사회 변화를 이끌 주요 트렌드다.”
-<3부 이미 미래에 도착한 사람들> SAP 제품 및 혁신 담당 이사회 임원 베른트 루커트 인터뷰 <디지털 경제의 ‘인텔 인사이드’> 미래에는 직업에 무엇이 지원될 것 같은가? 답변 중

독일 최대 소프트웨어 회사 SAP의 임원을 상대로 한 인터뷰였기 때문에 나올 수 있었던 언급이었지 싶다.

이어지는 <4부 2030 7대 메가트렌드>엔 흥미로운 대목이 여럿 있어 따로 적어 뒀지만 IT와 관련성은 책의 나머지 내용보다도 훨씬 적다. 메가트렌드의 표제만 적어 보면 <01 인구학적 역학> <02 세계화와 미래 시장> <03 자원 부족> <04 기후 변화와 생태계 위기> <05 기술 발전과 혁신> <06 글로벌 지식 사회> <07 지속 가능성과 국제적 책임> 이렇다.

그나마 <05 기술 발전과 혁신>의 하위 트렌드로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이 다뤄지고 있다. 반갑게도 미국 IT거인 시스코시스템즈 얘기가 나온다.

p339
시스코에서는 2022년까지 증강 현실용 인터페이스로 14.4조 달러의 이익을 얻을 것으로 예상한다. 스마트 안경이 결합한 새로운 휴대기기가 트렌드를 선도하여 네트워킹 기기에서 네트워크에 연결된 인간으로 나아간다. 한국의 송도처럼 처음부터 스마트 도시로 설계되고 구축된 도시도 태어난다. 스마트 도시에서는 물리적인 개체가 서로 연결되어 상호작용하거나 인간의 지시를 따른다. 높은 도시화율의 압박에 직면한 국가에서는 공공과 민간의 파트너십을 통해 구축되는 스마트 도시가 점점 더 흔해질 것이다.
-<4부 2030 7대 메가트렌드>  <05 기술 발전과 혁신>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송도에 시스코의 사물인터넷 전략이 투영된 스마트도시 환경이 조성돼 있다는 건 이미 알려진 얘기다. 다만 유럽 컨설팅회사가 주요 보고서에 이걸 따로 언급할만큼 아직까지는 스마트도시의 구축사례가 흔하지 않다는 걸 방증한다. 국가가 직면한 높은 도시화율의 압박을 스마트도시 확산의 방아쇠로 지목한 점이 눈길을 끈다.

아래 인용 부분은 기술과 직접 상관이 없다. 다만 한국의 노동인구와 관련해 우려스러운 현실을 전망한 대목이라 시사점이 크다.

p360
미래의 인재들은 현재보다 훨씬 더 국제적으로 일할 것으로 예상된다. … 2020년 학생 이동의 최대 흐름은 인도에서 미국(118,000명), 중국에서 미국(101,000명), 중국에서 호주(93,000명), 한국에서 미국(81,000명), 중국에서 일본(64,000명), 인도에서 영국(59,000명) 순으로 나타난다. 영어권 국가(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는 해외의 고급 인재를 얻는 반면, 아시아 국가(인도, 중국, 한국)는 고도로 숙련된 노동력의 두뇌 유출 가능성에 시달린다.
-<4부 2030 7대 메가트렌드> <06 글로벌 지식 사회>

p362
노동 시장 참여의 양성평등은 인구 구조의 변화에 따른 도전을 상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여성의 노동 참여율이 2030년에도 2010년 수준으로 머물러 있다면 이탈리아의 경우 노동 인구가 8% 감소하고, 한국의 경우 노동 인구가 10% 감소한다. 하지만 2030년에 여성의 노동 시장 참여율이 남성과 동일한 수준까지 늘어난다면, 이탈리아의 경우 노동 인구가 19% 상승하고, 한국의 경우 노동 인구가 11% 상승한다. 노동 시장 참여의 양성평등만 이뤄져도 노동 인구 감소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4부 2030 7대 메가트렌드> <06 글로벌 지식 사회>